곁에 있어 주는 것 ( Just being there! )

by wecrun

  2020년 1월, 우리 부부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리스 비자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우리 생애 처음으로 외국 생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퇴 이민 생활을 그리스 제2의 도시 Thessaloniki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코로나로 인한 방역 조치로 아리스토텔레스 대학에서 개강한 현대 그리스어 수업은 첫날 딱 한 번 대면 수업 후 ZOOM 수업으로 대치되었고 모든 외출은 신고 허가시스템으로 통제되었다. 디폴트로 인해 그리스 의료시스템은 부실하고 병상도 넉넉지 않아 감염 예방을 위해 살얼음판을 걷듯이 생존해야 했다.

  난민교회를 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이자 목사인 M과 교제하며 협력관계의 일환으로 가끔 사역을 돕긴 했지만 2년간은 공부와 문화 적응 기간으로 조용히 지나갔다. 작년에 비로소 방역이 완화되면서 M과 협력 사역이 열렸고,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여름엔 1박 2일 난민 수련회도 보람 있게 치를 수 있었다.

  하루는 중동지역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여 난민들과의 소통과 네트워크를 주도하던 S 형제가 우리에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본인과 가족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으로 이 사역에서 손 떼고 보수가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은데, 그 결정을 나보고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큰 유혹이자 시험이었다. 덥석 S 형제와 손을 잡는다면 독자적 사역이 가능해지고 나아가 난민교회도 열릴 수 있으나 동시에 그 형제의 모든 것에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하고 기존 사역자들과 깊은 갈등 관계에 빠져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했다. 매우 민감한 결정이 내 눈앞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형제님, 당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설혹 당신이 어떤 잘못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인내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결국은 바른길로 몰아가실 것이요. 그러니 사람에게 묻지 말고 깊이 기도하고 당신이 결정하시오.”라고 권면하여 성급하게 주도권을 잡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시니어로의 오랜 경험과 성령께서 내려놓음의 은혜를 부어 주셨다고 생각한다. 잠시 당황하며 고민하던 그 형제는 다음날 주일 예배 후 본인이 앞으로 나가서 회중들에게 자신의 방황을 얘기하더니 교회와 우리 사역에 남기로 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이후 우리는 M 선교사, 아일랜드 출신 H 선교사와 연합해서 S 형제의 후원에 힘을 보탰고 여러 모양의 협력관계로 서로 간의 신뢰를 쌓은 결과, 비로소 한 팀이 되었다.

  두 자녀와 아내를 거느린 난민 가장 A는 영어를 전혀 못 해서 페인트칠 노동으로 살아가는데 집에 도둑이 들어 그나마 모아둔 돈을 잃고 낙담하는 모습에 교회 이름으로 특별헌금을 모금해서 전달하고, 며칠 뒤 위로차 배를 타고 가까운 해변에 놀러 가서 수영을 가르쳐 주었다. 얼굴 담그기부터 가르치고 배를 받쳐 주었더니 평생 처음 물에 뜨는 경험을 했다고 흥분해서 다 큰 어른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몇 시간을 허우적대며 계속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해변에서 기로스, 수블라끼를 사 먹으며 나라마다 다른 화장실 문화를 얘기하며 깔깔대고 가끔은 페르시아 음악을 틀어놓고 누가 보든 말든 부부가 일어나서 민속춤을 추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더운 한 여름 하루를 즐겼다. 다음날 A의 부인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는데 자기 남편이 “그리스에서 난민 생활 4년 동안에 어제가 제일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에 우리는 짧은 기쁨과 함께 서서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저 하루, 같이 놀아준 것뿐인데……” “곁에있어 준 것뿐인데……”
Just being there!

글 최바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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