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사회적인 고립, 기회의 축소(유리벽?), 따돌림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명목상의 러시아정교인인 20%의 러시아인들과 10만 명의 고려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인구의 50-60%의 카작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무슬림 종족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1%도 안되는 무슬림 배경의 그리스도인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교회학교에 다니는 민감한 10대들에게는 학교에서 그리고 친척들의 모임에서 따돌림당할 때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것이 결코 행운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D와 G는 ‘나우르즈’(무슬림 새해)에 친척언니 오빠들이 모일 때도 즐겁지 않다. “너희는 배신자야”라는 말을 견뎌야한다.
이들보다 더 안타까운 경우는 9월이면 스포츠 특수 대학교에 지원하는 A와 세 여동생의 경우다. 엄마는 믿는 집안 출신이고 아빠는 무슬림이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남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소위 불신 결혼한 경우 자녀들은 자라면서 잘 믿는 경우보다는 반대의 경우가 일반적이다. 요즘 A는 아빠가 다른 도시로 일을 가지 않아서 아빠 눈치를 보며 교회에 나오고 있다. 모임 중에도 아빠가 부른다며 서둘러 여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의도적으로 모임 참석을 방해하는 것이다. 아빠가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한다. 아니면 차라리 그의 아빠가 먼 도시로 일을 떠났으면 하고 기도해주고 싶다. 그의 믿음이 자랄 시간이 좀 더 주어졌으면…. A는 과연 언제쯤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도해본다.
한편으로는 소수지만 20대, 30대에 믿음에 우뚝 선 그리스도인 2세대들도 있다. 결코 흔하지는 않다.
우리 교회의 지하 모임실 한편에 작은 공간이 있다. 먼 남쪽 시골에서 올라와 4, 5년을 창문도 없는 그 방에서 기거하는 I 형제와 그의 동생 R이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우리 W사의 농업센터에서 잠시 일하게 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 그 가족은 그들의 고향마을에서 유일한 신자 가정이었다. 그 마을의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어서 I 형제 가정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과 박해를 받았었다. 형제들의 아빠는 큰 도시에서 일하고 믿음의 성장과 미래를 위해 한국어도 배우라고 I 형제가 군 복무를 마친 후부터 두 형제를 우리 센터에서 지내도록 부탁해왔었다. 그랬던 것이 5년이 지났다. 지난주 모임에서 온 교회는 이 형제들을 위해 축복을 빌었다. 이제 형제는 해외로 일하러 간다. 자신들의 몸의 고향은 시골마을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이 교회라고 하면서 3, 4년 후 꼭 돌아와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싶다고 했다.
M 형제의 90세 노모가 지난 4월에 세상을 떠났다. 기억나는 그분의 마지막 말은 “나는 교회 가는 것이 제일 좋아”라는 말씀이었다. 시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분이 나고 자라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시던 시골의 남편 옆에 묻히셨다. 그곳은 무슬림 묘지였다. M 형제 부부는 노모의 자녀 중에서 유일한 믿는 자녀였고 나머지 자녀들은 명목상이더라도 무슬림들이었다.
아직도 이 땅에서는 무슬림으로 태어나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도 다시 죽어서 무슬림 장례절차에 따라 생이 마무리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주님의 품에 안기는데 하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지 마음이 아플 뿐이다.
글 백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