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부터 우리 가정은 여러 직업으로 정체성을 바꾸어가며 이 땅에 얕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2년 이후로 현재까지 거주증이 없습니다. 사업체를 등록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우리에게 본격적인 사업 비자가 과연 필요한지, 왜 필요한지 고뇌하다가 시간이 흘렀습니다. 1년에 몇 번씩 온 가족이 비자 여행을 가는 불편함에도, 우리를 향한 현지 이웃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사업을 시작하면 사역의 초점이 분산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와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도 분주하다는 핑계로 고충을 감내하며 살았습니다.
2017년 지방 도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우연히 동네 마트에서 만난 한 여학생의 제안으로 생각지도 않게 청소년 센터의 한국어 강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K-컨텐츠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참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희망과 고민을 들으며,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 자연스레 신뢰의 관계를 쌓았습니다. 더 이상 사업 비자를 미루지 말자는 생각이 들 무렵, 우리 부부는 “이왕 일을 한다면 재미있는 쪽으로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2022년 <가치 센터>라는 이름의 한국 문화 기반 배움터를 등록하기로 했습니다. 가치를 배우고 나눔으로 함께 성장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됐습니다. 세무사와 서류를 준비했고, 크고 깨끗한 건물을 좋은 가격에 빌렸고, 대기업 UX 디자이너 출신인 동생이 센터 로고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건축사에게 인테리어 디자인을 의뢰해서 견적을 받아서 시공 업체와 계약을 마쳤습니다. 문제는 시공하며 드러났습니다. 하루에 벽돌 몇 장씩만 올리는 인부들도 답답했지만, 건물 내 전기 효율이 생각보다 낮아서 여름에는 냉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습니다. 결정적으로 건물주가 계약서 내용을 바꾸자며 제안한 조항이 전기 요금, 수도 요금, 각종 세금을 우리 몫보다 터무니없이 많이 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결국 공사 중간에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후에 이 건물주가 우리의 센터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하려고 공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도시 최초의 한국 문화 센터를 기다리던 현지 친구들의 반응은 보증금을 안 주면 변호사를 불러라, 남은 월세를 못 주겠다고 해라, 거짓말을 해라, 협박을 해라 등등으로 비슷했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속상함과 혼란이었습니다. 분명히 이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거란 확신과 응답을 갖고 시작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우리가 조급했을까요? 판단력이 흐렸을까요? 금전 문제 앞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종교도, 신뢰도 내던지곤 하는 것이 여기 임대인들인 걸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어디에 가치(value)를 두고 있었던가!’를 떠올렸습니다. 신중한 판단으로 시작한 일이니 멋진 외관과 내부 구조를 갖추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마음, 팀과 주변 사역자들에게도 이 사업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또 다른 생각이 있으셨나 봅니다. 우리와 일하는 방식이 다른 현지인들을 존중하는 자세, 우리가 왜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을 하는지에 대해 주변 이웃과 친구에게 설명하며 때마침 묵상중이던 성경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는 일, 우리 일을 통해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슬람이 외국인과 약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직접 보게 하는 일들로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셨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업 추진은 잠시 멈추었지만 사역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현재진행형이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신혼 초, 고시촌의 교회 고등부 학생들을 거의 날마다 집에 초대하여 밥을 먹고 공부하고 놀러 가고 말씀을 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통장 잔고는 늘 없었지만 그저 아이들과 즐겁게 지냈던 시절이었습니다. 10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난 제자들의 삶과 가치관 속에는 놀랍게도 우리가 함께 한 일상이 여전히 살아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으로 자신이 조금 더 좋은 크리스천 어른이 된 것 같다는 말에 울컥했었습니다.
사업은 계속 추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크고 멋들어진 <가치 센터>가 아닐지라도, 이미 우리의 중심(center)에 자리한 복음의 가치(value)가 있기에 여전한 모습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어느 영화속 대사 “뭣이 중헌디?”가 떠오릅니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글 황야(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