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한때 크메르 왕국(802~1431년)은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며 대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13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431년 태국의 전신인 시암(Siam)의 여러 왕국, 특히 빠르게 성장한 아유타야 왕국에 의해 수도 앙코르톰을 내주며 멸망했다. 이후 캄보디아 왕조는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지속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의 침략과 간섭을 받는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캄보디아는 1863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의 보호령(protectorate)이 되어 경제적 수탈을 당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태국과의 전쟁 중 일부 태국 영토를 캄보디아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현재의 영유권 분쟁은 이러한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충돌
이번 양국 간 국경 분쟁은 5월에 시작되어 7월에 격화되었다. 5월 28일, 두 나라 국경지역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여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7월 24일에는 태국 군인들이 국경 인근에서 지뢰 폭발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며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때부터 양국은 로켓포와 전투기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교전을 벌였고, 민간인을 포함한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자리하고 있다. ICJ는 분쟁의 핵심 지역인쁘레아 뷔히어(Preah Vihear) 사원에 대해 캄보디아의 영유권을 인정했지만, 태국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2008년과 2011년에도 양국 간에 교전이 발생한 바 있다.
이번 사태에서도 두 나라는 상대국이 사태의 유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태국인은 자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사실 캄보디아는 태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국경선을 침범했습니다. 만약 도둑이 당신 집에 들어와 물건을 훔친 다음, 평화를 기원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반면, 한 캄보디아인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지뢰 폭발로 자국 군인이 부상한 것에 대해 캄보디아를 비난하는 태국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국은 지뢰를 설치한 책임을 캄보디아에 돌리면서도, 동시에 그 현장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휴전
이후 UN과 ASEAN의 중재, 그리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협상 압박 등의 외교적 노력으로 양국은 7월 28일,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휴전 합의가 분쟁의 완전한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쁘레아 뷔히어 사원과 그 주변 지역을 둘러싼 영유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각국이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태국에서는 7월 1일부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직무가 정지된 패통탄 친나왓 총리보다 군부의 대응이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며, 캄보디아도 장기 집권 중인 훈센 가문이 민족주의 정서를 통해 정치적 불안을 잠재우려 할 가능성이 높다. 국방력, 경제력, 인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태국이 캄보디아를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캄보디아는 외교적 해법을 통해 자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캄보디아가 이번 사태의 자국 내 사상자 수를 축소 발표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무력 충돌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복음
양국 간 무력 충돌은 국경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선교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확전이 되었거나 외교적 해법이 지연되었다면 선교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수도 있다. 이동 제한, 통제 강화 같은 직접적인 영향은 물론이고, 민족주의 정서의 고조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의 복음은 전쟁과 갈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구호 활동과 공동체적 돌봄이 복음의 통로가 될 것이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엡 6:15, 새번역) wec
글 정의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