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는 계절이 크게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6개 월 동안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다가 5월 말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11월까지 내린다. 요즘은 기후 변화 탓인지 내리는 양상이 조금 달라지고 있지만, 우기에는 대체적으로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세 차게 쏟아진다. 하수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고 계속 되는 난개발로 인해 도시 곳곳에 있었던 벙(자연 호수)들이 메워지면서 짧은 시간의 폭우에도 도로가 잠 겨 통행이 어려운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어느 하 루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길이었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지만, 여전히 도로 가장 자리는 빗물이 고여있고 사방은 어둑어둑해지고 있 었다. ‘모또’라고 불리는 오토바이들이 정체된 도로 와 비로 잠긴 곳을 피해 인도로 올라오기도 하고 차 들 사이를 곡예 하듯이 지나고 있었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자그마한 소녀였다. 좁은 인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광주리 속 연밥을 초점 없이 바라보 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팔려고 애쓰기조차 하지 않는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삶 의 짐이 지워진 것 같았다. 거리에서나 관광지에서 ‘모이 돌라’(1 달러)를 외치며 천연덕스럽게 구걸하는 아이들에게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깊은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의 폴포트 정권 시절 크메 르 루즈에 의해 자행된 대량 학살의 역사를 비껴 간 사람이 있을까 싶다. 직접은 아니어도 부모, 친 척, 친구의 가족, 이웃 등등. 누군가의 삶에는 여전 히 킬링필드의 흔적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다. 우 리의 현지어 교사이며 목사인 P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직접 그 시절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 세 대가 겪었던 다양한 풍파의 영향을 받으며 성 장했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이로 두 아이의 아 버지이기도 한 그는 10년 동안 외국인을 대상 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 단 체의 몇몇 한국 선교사들이 그로부터 크마에를 배웠고 우리 부부도 2년 동안 그에게서 언어를 배웠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단순히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나 전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 는 유익도 얻었다. 주일이면 P의 집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된다. 가정교회 성도들은 대부 분 청소년과 청년들이다. 2020년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모일 수 없어서 소그룹 모임을 위주 로 사역을 하고, 주중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언어를 가 르치며 목회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나 P 와 막 시작한 S교회를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우리 집 근처 골목에는 좋은 이웃들이 많다. 스쳐갈 때 반갑게 인사하고 약간은 쑥스러운 듯 미소 짓는 그들의 모습에서 순수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매일 집 앞 골목을 한 시간 정도 걸으며 운 동하는 아주머니가 있다. 적어도 일주일에 2~3 번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밝게 웃으며 인 를 건네는 이웃이다. 지나갈 때마다 영어와 크마에를 섞어서 몇 마디 건네는 툭툭 운전사 아저씨, 망고를 따다가 사진을 찍을 테니 포즈를 취 해달라는 부탁에 기꺼이 응하는 남자, 우리 차가 고장으로 멈춰 서자 자기 일처럼 도와주던 사람 들 말이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 그리고 프놈펜 남쪽의 쓰레기 매립장 주위에 사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하루 500대의 트럭이 내다 버리는 쓰 레기 더미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쓰레기를 줍는 아이들과 가족들이다. 그곳에 한 학교가 있다. 아이들은 예배하고 공부와 태권도, 기본 위 생수칙을 배우고 아침과 점심을 제공받는다. 섬 기는 이들의 가정 방문과 구제는 이곳의 핍박한 삶에 그리스도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오면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더 크 게 대답하고 더 큰 목소리로 찬양한다고 한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바르 게 성장해 나가길 소망해 본다.
글 최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