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면 봄이 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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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 여느 때처럼 언어 수업을 위해 현지인 언어교사 ‘꽃님’이 집에 왔다.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엔 큰 봉지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꽃님을 서둘러 집에 들어오게 했다. 우산을 들고 있는 게 무색할 만큼 겉옷이 비에 젖어 있었기에 서둘러 외투를 받아 말리려 걸어두니, 들고 있던 봉지를 내게 건넸다. 물기 없이 뽀송한 봉지를 보며 도시 외곽에서 우리 집까지의 긴 여정 내내, 꽃님의 우산이 지켜주고 있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싶었다. 그 안에 담긴 건 얼마 뒤 생일을 맞이하는 나와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아이 선물을 사기 위해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시장에 다녀왔고,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이런113호_내지작업 수정안.indd 28것저것 샀다며 다양한 것들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로 감싼 꽃을 주었다. 아침에 집 뒤 언덕에서 꺾어왔다는 꽃에 대한 설명도 덧붙이며 말이다. “언덕에 이 꽃이 피면 봄이 오는 거예요.”
정말 봄이 왔다. 추웠던 회색 도시에 초록 새싹이 돋아났고, 겨우내 울적하고 한국에 가고 싶단 생각을 수차례 반복하던 내 마음에도 따스한 봄이 왔다. 봄에는 이곳에 살아도 즐거울 것 같은 희망이 피어났다.
선교지가 처음도 아니고 든든한 가족도 있고 팀원들도 정말 좋은 사람들이지만 타지 생활이 제법 고단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다.지난 여름, 15개월 된 아이와 함께 이곳에 도착해서 네 번째 계절을 지나고 있다. 그사이 아이는 두 돌을 지나며 입이 트여 상호작용도 하며 한창 예쁘다. 나의 일상은 보통의 육아맘처럼 아침에 눈뜨자마자 육아가 시작되고 아이가 잠든 후 밀린 살림을 돌본다. 거기에 언어 공부까지 더해져 정신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인데, 지친 밤 나를 위로해 줄 치킨과 떡볶이가 배달되지 않는 현실은 가끔씩 버겁다.
중앙아시아에 있지만 아프리카만큼 가난한 이 나라는 2025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뭐가 없고 또 없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는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이전을 보는 것 같다. 전기와 물이 불시에 끊기는 일은 적응이 되는 듯싶다가도 여전히 잔잔한 스트레스이다. 그나마도 수도에 살기에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인데 말이다. 이곳 수도는 평양과 닮았다. 가난한 독재국가가 보여주기 위해 만든 도시. 어설픈 현대화는 슬쩍 보면 다 갖추어진 것 같지만 내실은 없는 위태로운 모습이다. 화려한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면 어김 없이 바닥 타일은 깨져 있고, 달려있는 전구는 나가 있으며,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아주 값싼 임금으로 소비된다. 동요 속 ‘도깨비 나라’는 이상하지만 아름답다고 했는데, 이곳은 그저 이상하기만 한 것 같다.
여러 의문을 가진 채 일상을 살던 어느 날은 학원 선생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웃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단골 상점의 상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되고, 꽃님의 집에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들이 사는 이 이상한 나라에 한 걸음 들어가 보니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소망을 더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정전이 더 잦은 겨울, 전기가 나가면 난방도 요리도 할 수 없이 긴긴밤을 보내야 했기에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피어 있던 꽃을 보고서야 봄이 도착해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마주하게 되었다. 봄비에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며 소중한 선물을 건네주던 꽃님의 다정함은 넉넉히 모든 것을 녹일 만했고, 봄은 예상보다 더 생기 있는 시간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예상된다. 집 마당에는 포도 덩굴이 그늘을 만들고, 시장에는 값싸고 달콤한 제철 과일들이 가득한 풍성한 계절일 것이다. 바로 어제 외출 후 벌겋게 익었던 아기의 두 뺨을 떠올려보니 여름도 이미 와 있나 보다. 이제는 여름의 달달함을 맛볼 차례이다. w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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