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밟은 지 13년이 다 되어가면서 캄보디아에서 내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은 웬만하면 다 겪지 않았을까 생각할 즈음,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시골에서 사역하면서 진흙 길에서 오토바이를 타다 날아가기도 하고, 초기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 가정 방문을 하다가 급하게 마을 회관을 찾아가야 한다거나, 험한 도로를 달리다 광폭타이어가 ‘쾅‘ 하고 터져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여름에도 그렇게나 모기들이 나를 사랑하더니, 이곳 캄보디아 모기들은 건기, 우기 할 것 없이 내게 달려드는 것이 거의 스토킹 수준이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내 피가 외국 사람의 것이고 달아서 그렇다고 한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기 기피제를 뿌릴 필요도 없다. 뭐 시골 사람들은 어차피 모기 기피제를 뿌리고 살지도 않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프놈펜에서 살고 있는데, 50년 만에 오는 폭염이라 더위에 강했던 나도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중 캄보디아 새해 명절 때, 아는 선생님에게 오토바이를 빌려 조용한 거리에서 함께 연습하고 있었다. (새로 이사한 곳이 프놈펜 시내와 멀어서 다른 개인 교통수단이 없던 나는 소형 툭툭이인 ’그렙‘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렙의 가격은 꽤 비싸다) 오래전에 시골에서만 오토바이를 잠깐 탔었고, 복잡한 프놈펜에서는 다시 연습해야 했기에, 대부분의 캄보디아 사람들이 시골로 간 틈을 타서 아주 넓은 길에서 자신 있게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타지길래 난 속으로 신이 나서 ‘오 이 정도면 복잡한 도로에서도 잘 타겠는데…’하고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자신 있게, 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은 동료 선생님께 오토바이를 양도했다. 그리고 그분은 서툴지만 천천히 오토바이를 몰고 유유히 사라졌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큰 개들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웬만한 모든 동물은 다 좋아하고 자라는 동안 여러 종류의 반려동물을 키웠으며 지금도 집에서 고양이를 봐주고 있던 나였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정말 전혀 겁먹지 않고 사랑스럽게 개들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그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내 옆을 스치자마자 나를 뒤에서 한번, 그리고 한번 더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개가 내 뒤에서 점프한 것이라 생각하고 나를 물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개는 분명히 나를 두 번이나 물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내가 개에게 물리다니…’ 아무리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못생긴 개들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개에게 물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캄보디아에서 보통은 개 주인과 연락이 닿을 확률이 아주 낮은데 친절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감사하게도 개 주인과 연결이 되었다. 명절 때문에 시골에 있었던 개 주인은 병원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때가 캄보디아 명절이라 방문한 모든 작은 병원들이 문을 닫았고, 결국에는 캄보디아에서 제일 큰 국립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의 의사들은 내 상처가 심하니 꼭 파상풍과 광견병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이 큰 병원에 파상풍약은 있었지만, 광견병 약이없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함께 오토바이를 연습했던 신참 동료 선생님의 정보력으로 한국인 의사가 하는 작은 클리닉에 연결이 되었고, 다행히 문도 열었고 약도 있어서 광견병 주사약을 찾아 헤맨 긴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5차 까지 맞고 걱정했던 상처는 다행히 잘 아물었다.
우리 유머러스 한 하늘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또 어떠한 경험을 하게 하실까 기대가 된다. 꼭 그 경험이 힘든 일만은 아닐 것이다. 힘들지만 소소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눈물 나는 많은 순간들 그리고 시간들. 모두 아버지와 함께 써 가는 나의 인생 이야기이기에 오늘도 나는 기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제일 걱정했던 것은 동물을 사랑하는 내가 개에 대한 트라우마(상처)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길거리에서 큰 개를 보면 아주 살짝 멈칫하는 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고 못생긴 개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래서 다행이다.
글 이향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