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느 선교사 자녀와 같이 해외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지냈다. 그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에 살면 서 나에게는 현지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현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영어만을 사용했다. 영어 문화권의 사람들처럼 사고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영어가 더 편했다. 나의 한국말은 영어를 번역한 말이었고, 듣는 음악과 보는 영화도 모두 영어로 된 것들이었다.
그러던 2018년 6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날이 내게도 찾아왔다. 바로 선교지와 친구들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더 이상 나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대안학교에 가게 되었다. ‘영어 문화권에 익숙한 아이가 어떻게 대안학교에 갔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내 주변의 사람들 중에 외국인들은 내가 당연히 미국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은 내가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치의 문화적 불쾌감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나는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 문에 어디든 잘 적응할 수 있고 문화충격이 나에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오산이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마치 문화충격이라는 저수지를 막고 있던 댐을 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구멍이 하나둘씩 뚫리면서 예고 없이 댐이 완전히 허물어졌을 때, 문화 충격과 함께 몰려온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렸다. 모두가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국적이게 생겼었 더라면, 한국말이 어눌했더라면 나를 좀 더 이해해 주었을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색을 설명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을 피하면 그만이었고, 혼자 있으면 스 트레스도 풀렸는데, 대안학교는 기숙사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간을 허락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한국에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친구들이 쌔고 쌨는데 왜 저를 여기 두시는 거죠?” 아직 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딱히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가려 한다. 가 장 선한 길로 나의 걸음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 삶에 펼쳐질 주의 놀라운 일들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글 이지민 (이지구, 도우리 선교사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