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선교 일상 – 질병과 맞서다

by wecrun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통행금지가 되어 모든 대중교통도 멈춰 서고, 필요한 비즈니스를 제외하고 많은 비즈니스들이 중단되었습니다.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은 비상사태가 약간 완화되자마자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코로나는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6월 말부터 심각해지던 상황은 7월 초 아주 심각해졌습니다. 체육관에 만들어진 임시 병원에는 환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의약품과 의료진은 항상 모자라고, 뉴스를 통해 계속 안타까운 소식들이 전해졌습니 다. 병원에서 쓸 약을 환자가 직접 구해와야 하는 시스템이라 약국 앞엔 항상 장사진을 이루었고, 약 값은 몇 배씩 치솟았습니다. 코로나 검사를 받기도 어렵고 검사비도 개인 부담인지라, 확진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원인 불분명 폐렴’으로 분류되었습니다. 

7월 중순, 53세의 건장한 한국 남자 선교사가 코로나 의심증상으로 아내에게 진료받으러 왔습니다. 당시엔 농담도 할 정도로 의식이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산소포화도를 측정하니 60 정도가 나왔습니다. 바로 산소를 공급하여 산소포화도가 80~90 가까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위험했습니다. 1차 병원인 아내의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서 급하게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응급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미 현지 환자들로 만석인 병원들은 상태가 위중한 외국인 환자를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밤새 의식 잃은 환자와 함께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국 대사 관의 도움으로 환자분을 현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켰습니다. 일단 중환자실에 가면 환자 상태를 알 길이 없습니다. 단지, 그 후 증상이 조금 개선되셨다는 소식을 건네 들었습니다. 일단은 마음을 놓고 다른 환자들에게 집중하고 있던 중, 입원 일주일 후 그 사역자가 돌아가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화장터가 없어서 화장을 해서 한국으로 시신을 옮길 수도 없어서 이곳에 매장을 했습니다. 사망자가 감염자이고 보호자는 접촉자이기에 조문도 받지 못하고 소수 인원으로 장례가 진행되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그 아내 사역자는 전세기 편으로 한국에 있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며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들어 가기 전 날 출근길에 그 아내 선교사로부터 노력에 감사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낮 공원 벤치에 앉아 아내가 펑펑 울었습니다. 전쟁 같은 시 간이었습니다.

애도할 시간도 없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처음 마주치는 병과 싸우느라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조금씩 신규 확진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 했고 아이들의 등교와 해외 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재들이 풀렸습니다.그러나 10월이 되어서 2 차 코로나 확산이 일어났습니다. 10월 4일 선거 이후 대통령 지지당이 의회의 93%를 차지하게 되자, 부정선거 의혹 관련 데모가 발생했고, 선거관 리위원회는 부정선거를 시인했으며, 사람들은 수감 중이던 전 대통령을 감옥에서 빼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곧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다행히 계엄령은 길지 않은 열흘 정도 지속된 후 해제 되었으며, 대통령은 사임했고 또 다른 권력이 장악을 했습니다. 겉보기엔 평화를 찾았으나, 현 집권층은 과거 폭력을 휘두르던 세력이라 아직 정치적 불안정은 남아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곳에 온 지 20여 년 된 60세 정도의 선교사 부부도 코로나 확진을 받았습니다. 우리 는 주말에 시외에 있는 그들 집에 왕진까지 가면서 회복을 기대했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간이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가 PCR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지만, 여전히 불안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파송 교단에서 이송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고 위기관리재단이 행정적인 부분들을 도와주어서 한국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간 이들은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고도 속히 회복해서 지금은 한국 병원에서도 퇴원하였습니다. 아마도, 7월에 돌아가신 선교사를 보고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다가 한국에 와 있다는 안정감이 치유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환자들을 직간접으로 접하면서 이들에게 회복되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글 이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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