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성경적 선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by wecrun

  선교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자의적 선교나 인본주의적(humanistic) 선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교를 왜곡시키거나 망가뜨릴 수있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단이나 선교단체들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선교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선교사역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바른 선교는 성경의 지도와안내를 받는 선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후로 하나님의 선교는 그본질이 퇴색되고 변질되어 왔습니다.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선교가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선교를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켄네스 라뚜렛(Kenneth S.Latourette) 박사가 언급했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의 선교와 현대 선교는 확연히 다릅니다. 19세기에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게 사용되었던 말씀 중심의 전도사역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회봉사와 사회변혁이라는 변형된 선교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선교는 봉사를 포함하지만 봉사가 선교는 아닙니다. 말씀을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행위가 곧 선교적 행위는 아닙니다. 선교는 복음전파, 곧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행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봉사와 사회개혁이선교라면 빌 게이츠, 쥬커 버거, 워런 버핏은 훌륭한 선교사일 것입니다. 말씀 선포가 생략된 봉사행위를 선교사역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NGO와 선교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NGO는 봉사를 목적으로 하지만 선교사역은 말씀선포와봉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통적인 선교개념들이 서서히 변질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1년 뉴욕의 모홍크(Mohonk)에서 ‘국제선교사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결성된 이후로, 에딘버러 대회가 추구했던 선교적 목적과 방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에서는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라는 발표문을 통해 종교적 상대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타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고만 하지 말고 타 종교가 지닌 부분적 진리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후 1952년 독일의 빌링엔(Willingen)선교대회에서는 선교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시작됩니다. 선교사역에서 전도개념이 사라지고, 사회참여와 사회개혁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됩니다.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미명하에 전통적인 선교개념이 사라지고 변형된 선교개념이 서구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와 사상은 지금까지도 진보적인 선교를 주장하는 써클에서 애용되고 있습니다. 정치를 바로 잡는 행위, 한 사회가 지닌 “구조 악”(structural evil)을 제거하는 일, 경제적 착취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는 행위,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한 방법을 동원하는 일, 정치적 해방을 돕기 위해 무기 살 돈을 지원하는 일 등을 선교사역이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급기야 1973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태국의 방콕(Bangkok)에서 열었던 선교대회에서는 “선교사 모라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타 종교를 믿고있는 지역이나 국가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더 이상 보내지 말 것을 주문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타 종교들을 통해 구현되어 왔기 때문에 서구 교회들이 더 이상 타 종교를 믿고 있는 민족이나 국가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송하지 말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소위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WCC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91년에는 호주의 캔버라(Canberra)에서 열렸던 WCC 선교대회에서 한국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였던 정현경 씨가 “초혼제”를 지내며 죽은 영혼들을 달래는 굿을 하였습니다. 정 교수는 하나님께서 수천 년 전부터 한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해 오셨을 뿐 아니라 굿이라는 종교적 매체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정 교수는 불교에 등장하는 “관음”이 한민족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가 필요했듯이 한민족에게는 “관음”이 필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WCC가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교의 의미가 혼탁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 WEC선교회가 한국선교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인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WEC선교회가 좌경화된 선교개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적인 선교사역을 추구해 온 사실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선교가 무엇인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선교의 참된 의미와 방법과 목적까지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교가 무엇인가를 배우기 원한다면 성경을 바르게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교는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이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선포하는 행위가 선교입니다. 선교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의 선교사역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생력 있는 교회’(viable Church)를 세우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직교회(organizational Church)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은 교회 외에 어떤 기관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경적 선교란 말씀 교육을 통해 주님 닮은 제자들을 세우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된 선교 대위임령에는 네 가지 동사가 등장하는데, 그중 세 가지 동사는 모두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고 – 가서(going), 가르치고(teaching), 세례주고(baptizing) – 오직 “제자 삼으라”(make disciple)는 동사만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제자 삼는 행위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제자 삼는 방법으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모두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역이 선교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사역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교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예수의 증인들은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거하는 일과 더불어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는 자들입니다. 좋은 선교사가 되려면 성경에 정통해야 합니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성경학교(Bible College)들은 선교후보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학교들입니다. 모든 서구의 선교단체들은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 파송되기 전에 성경학교나 신학교에서 성경지식을 쌓는 훈련을 받도록 권장해 왔습니다. 목사 선교사든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든 상관없이 모든 선교사는 성경지식에 정통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교단체들은 선교후보생들이 파송받기 전에 일정량의 성경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과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와 협업을 진행해 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발로 밟는 모든 곳에서 말씀을 강론하고, 변증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설립되면 현지 교회를 책임질 장로와 집사를 세우고 그는 과감히 또 다른 사역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바울의 주된 사역은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삼 년이 넘는 긴 기간을 가르치는 일에 올인 했습니다. 선교후보생들은 반드시 현지인들과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성경적 지식을 채워서 나가야 합니다. 성경과 신학을 배우는 2-3년의 기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20-30년의 긴 기간 동안 선교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투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선교적 열정은 자칫 하나님의 선교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WEC선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선교를 실천하는 기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김학유(합동신학대학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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