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은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 추석 삼아 여러 친지들이 함께 벌초하러 모였다. 아버지 산소와 외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벌초했다. 시골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녀온 다음 날 저녁에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들아 엄마 키가 작아졌니?” “왜요?” “사람들이 내 키가 많이 줄었다고 하더라 나이가 들면 줄긴 하지만 말이다” “글쎄요, 저는 매일 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 뭐 줄면 주는 거지, 예수님 믿는데 방해되는 거 아니니까…… 호호호” 나의 어머니다운 유머이다. 안 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졌다고 하니 내심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그렇게 가볍게 웃고 지나갔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하신 한 마디가 머리에 맴돌았다. “뭐 줄면 주는 거지, 예수님 믿는데 방해되는 거 아니니까” 그래 맞다. 키가 줄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그리 큰 방해 요소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예수님 믿는데 방해되는 건 뭘까? 내가 하는 일? 내게 주어진 상황? 주변 사람들? 코로나? 이때, 내 마음 저 아래서 한 생각이 올라왔다. 나 자신, 바로 나 자신이라고…… 예수님을 믿는데 제일 방 해가 되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새삼 내 안에 다시 의미 있게 다가왔다. 관계에 있어서도, 사역에 있어서도, 기도에 있어서도 내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주변 사람도, 코로나로 멈춰 버린 사역도, 어떤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 안에 존재 하는 불완전함, 어리석음, 무지, 죄로 왜곡된 영혼이 내게 가장 큰 방해 거리다. 물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잘못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 반응하는 것은 결국 나와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어지면 나는 훨씬 비판적이 되거나 혹은 비관에 빠지곤 한다. 내 안에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죄된 나의 생각이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때론 그것이 어이없는 교만으로, 때론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낙심으로 나를 몰아친다. 그렇게 오래 연습하고 연습하는데도 나는 어찌된 일인지 또 교만해지고 다시 낙심한다. 내 영혼과 내 마음이 주님의 은혜로 조율되지 않으면 얼마나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지 그것은 나에게도 스트레스이며 타인에게도 아픈 감정을 만들어 내고 만다. 나는 나를 다스릴 수 없는 사람임에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내 힘으로 나를 다스려 보려는 노력의 미끄럼틀에서 또다시 미끄러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내 영혼을 드리지 않으면 나는 조금씩 망가지고 내 영혼의 수풀은 가시 덤불로 차오른다.
경건과 영성에는 왕도가 없다. 요즘 코로나로 인한 상황으로 유달리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관계로 인한 어려움으로, 사역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이 꽤 자주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찾으려 열심이었다. 그래서 그 즈음에 어머니의 우스갯소리가 그렇게 머리에 맴돌았는지도 모른다.
내 영혼에 원망과 불평의 수풀이 무성해질 때 나는 그리스도를 찾지 못하고 죄된 나만 본다. 그리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아버지 산소 벌초를 하러 가니 1년 사이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멀리서는 아버지 산소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작년에 벌초를 그리 깨끗하게 했는데도 말이다. 입구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자라 올라온 풀을 베며 들어갔다. 생각해 봤다. 내 영혼 어느 부분도 내가 한참을 들여다보지 않아 가슴만큼 자란 영혼의 덤불이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할 정도로 풀이 많이 자란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은 없는지 말이다.
내 영혼에 풀이 많이 자란 것 같다. 하나님께서 어서 내 안에 무성하게 자란 영혼의 가시 덤불들을 깨끗하게 벌초해 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주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 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 2f)”
글 장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