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다이어리
previous post
2018년 이곳에 NGO 사역을 총괄하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 사역과 언어,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감당하기 벅찬 상황이지만, 틈틈이 다양한 열대 과일과 음식을 싼값에 먹을 수 있는 행복에 더하여 이곳의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알게 되는 축복된 일상이 감사하다.
현지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집을 구했다. 8살짜리 주인집 딸(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에게 한국의 가수 중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은 ‘정국’이었다. 아아! ‘종국’ 그러면서 난 런닝맨을 떠올렸다. (그런데 BTS!) 아이들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예인들의 인기는 대단하다. 나는 몰라도 그들은 안다.
‘어디서 커트를 할까?’ 동네를 돌아다니다 드디어 적당히 고급스러운 이발소를 발견했다. 커트 2달러라고 쓰인 유리문이 있는 이발소.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증거다. 2000원에 커트하고 피서하고. 이곳은 미국 달러와 자국의 통화가 동시에 통용되는 나라. 달러가 통용되는 까닭에 통화 리스크가 작다. 무려 14개 한국 금융기관이 이곳에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OO대학 부설 어학원 1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주 5일, 매일 1시간 반 동안 결석하지 않고 꾸준히 한 결과, 얻은 것은 수료증뿐만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동기들과 사귀고(태국 자매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김밥을 먹기도 했고, 한국 선교사들과는 사역 계획과 삶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캠퍼스의 대학생들을 만나며 청춘으로 돌아가는 덤을 얻었다.
OO지역의 OO(이곳의 전통적인 주택 형태)에 살고 있다. 아파트는 공간이 작은데도 월세가 비싸기에 우리의 선택지에 없었다. 이 동네는 예전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이전한 국제학교를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우기에는 때때로 도로가 물에 잠겨 출입하기 어렵지만, 다른 것은 불편하지 않다. 집을 나서면 거의 예외 없이 만나는 이웃이 있다. ‘나’라는 중년 여자인데, 늘 우리에게 미소 가득 인사를 건넨다. 항상 8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그녀를 우리는 그녀의 강아지 이름 ‘끼미’를 따서 끼미 엄마라고 부른다.
올 들어 OO어 성경을 쓰고 있다. 전도에 유용할 뿐 아니라 언어의 진보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갈라디아서부터 시작해서 현재 히브리서까지 썼는데, 신약의 나머지 부분도 올해 말까지 끝내려고 열심을 내고 있다. 이곳의 언어는 일단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성조가 없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문장 구조 또한 단순하며, 동사나 명사의 변화가 거의 없어 말하기 어렵지 않다. 반면자음, 모음, 받침으로 구성된 단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야 읽을 수 있는 정도로 쓰고, 읽기가 어렵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단어들은 특히 그렇다. 이곳의 문맹률이 매우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유창하게 소통하는 소망을 갖지만, 갈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성경 한 글자 한 글자 써갈 때마다 노트의 남은 공간이 줄어들고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1963년부터 9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이곳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 그 영향의 흔적이 남아 있다. 파티 문화와 바게트 빵이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불어는 자부심의 상징이다. 언어도 불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어식 발음보다 불어식 발음을 따라 하는 경우도 흔하다. 흔히 마지막 자음의 발음을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아이스 라떼는 아이 라떼, 폴리스는 뽈리, 택스(tax)는 딱이라고 한다. 이젠 주문할 때 아이 라떼가 더 자연스럽다.
옛 제국의 영광…… 대학살의 아픔…… 이곳에 1528만(수도에 212만)이 오늘을 살아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워지고 있는 높은 빌딩과 그것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그 대조 속에서 우리도 오늘을 살아간다. 지금 그들에겐 보잘것없이 보이는 복음을 움켜쥐고.
글 J &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