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상한 마음에 뒷마당으로 나갔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흙 만지는 것도 벌레도 싫어하는 내가 풀을 뽑고 땅을 뒤집었다. 눈물이 나올라치면 하늘 한번 바라보고 흙 사이로 벌레들이 보이면 성을 내며 퍼냈다. 땀이 흐르고 손톱 끝이 까매지는 것도 상관없었다. 땅이 꺼질 듯한 내 한숨 소리는 5년 전으로 나를 데려갔다.
D가정과의 만남을 시작한 선생님들이 우리 부부를 모임에 초청했다. 이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며 그의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환희로 가득했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곳 NC지회에서도 ‘현지인과의 성경 공부 모임’은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NC에 온 지 4년이 되던 해였는데 그때까지 나는 현지인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모임에 큰 감동을 느꼈다. NC에는 현지 교회가 없고 제자들도 만나기 어렵고 당연히 공동체와의 만남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배운 언어가 찬양과 기도처럼 믿음의 언어로 표현될 때 참 신기했다.
D는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했고 성인인 딸과 아들이 있는데 아들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가족들과도 고립되었고 딸이 식당에서 일하는 돈과 장애 수당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왔다. 우리는 매주 만나 식탁교제를 하고 성경을 묵상했다. NC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시간은 귀하고 소중했다. 말씀이 그들 마음을 찌를 때, 은혜가 그들에게 부어질 때 우리는 함께 울었다. 모임을 하면서 그들을 괴롭혔던 큰 거미 환상이 더 이상 안 보이게 됐다는 얘기, 그들에게 ‘기적’이 뭐냐고 물었을 때 어두운 방에서 우울과 싸우던 딸이 모임을 하면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아들이 엄마와 누나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난리를 쳐도 우리는 계속 빛 가운데로 그 가정을 이끌며 그들을 안아주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전부가 되어주시기를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잘 받아들였다. 무슬림으로서 성경에서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진리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눈을 빛내며 다 믿는다고 했다. 그들의 가족들보다 우리를 진정한 가족이라 말해줬고 그들의 외로움과 소망 없음은 점점 빛 앞에서 사라져 갔다. 나는 일꾼으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많이 누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은 기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난동을 부릴 때면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그들의 불편함을 잘 알기에 우리는 강요하지 않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계속해서 묵상해 나갔다. 그 살벌했던 COVID19 시절에도 나는 한국식 보건위생을 따라 모임을 반대했지만, 그때도 D가정은 만남을 원했고 함께 섬기던 우리들의 건강의 위협(지붕 추락사고, 뼈결핵 재발, 갑상선암 수술, 코로나 사이토카인 폭풍 증후군 등)이 있었을 때도 오히려 만남은 더 달고 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은 중요한 선지자이지만 신이 아니고, 그들에게 신은 알라 한 분임을 고백하며 복음을 거절했다.
복잡한 마음에 나는 텃밭에서 한참을 있었다. 초보 농사꾼 손에서 가지런한 이랑이 만들어졌다. 파종은 어디에 하는지 두둑과 고랑을 두고 고민하던 나는 그제야 지금이 파종할 때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성난 김에 밭을 갈았을 뿐이다. 텃밭에서 깻잎이며 부추며 이곳에서 나지 않는 작물들을 키워서 우리에게 나눠 준 선생님들 생각이 났다. 농사 공부하며 매일 물주고 잡초를 뽑고 해충을 잡고 거름 주고 했던 그런 수고가 이제야 밝히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온 누림이와 함께 파종을 하며 이 허무도 함께 묻어주었다.
슬퍼한 들 화낸 들 내가 예수님보다 더 아파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예수님만이 소망이고 구원인데 이제 그들의 곤고한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제는 그들이 가여워서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한다. 파종한 들깨는 과연 자라긴 할까? 깻잎 때문에 또 허무를 배우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곧 걱정을 밀어내고 예수님을 바라본다. ‘아니지, 곧 깻잎김치를 담을 수 있을 거야.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고 바람 불게 하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또 틈틈이 나로 지켜 물주고 돌보게 하실 테니…’ D네가 김치처럼 깻잎김치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wec
글 주손길